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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철학, 들어보셨나요?-김태창 박사 강연

창아 2015. 9. 22. 21:07

 

김태창 박사님이 2015년 9월 22일(화) 오후 부산 동구 초량동 민주교육원 나락한알에서 '공공철학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

 

*김태창 박사님은 1934년 생으로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주한미국경제협력센터 기획보좌관, 인디애나대 대학원 사회학과 수료,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 대학원 국제관계학과 수료, 1980년 연세대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 학위 취득, 1969년 충북대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1992년 충북대 행정대학원장을 역임했다. 1990-92년 도쿄대학 객원교수를 거쳐 현재 25년째 일본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장래세대종합연구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공공철학공동(共働)연구소장, 수복서원(樹福書院) 원장을 맡으면서 ‘공공철학교토포럼’을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별을 세는 마음』,『인간, 현실 그리고 신』, 『창조적 인간과 건강한 사회』『사회과학에 있어서의 도전』과 공저로『공공철학(전20권)』,『이야기론(전3권)』,『공공하는 인간(전5권)』등 다수이다.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

 

다음은 2015년 9월 22일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부산 동구 초량동 민주교육원 나락한알에서 김태창 박사님께서 하신 간담회 형식의 강연이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 공공철학의 역사

 

일본 체류 25년 중 16년을 공공철학에 몸바치고 있다. 공공성이란 말은 추상적이고 이념적으로 보이는데 중국 일본과 달리 한국이 휩쓸리지 않고 가기 위해선 중국 일본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은 ‘큰 블랙홀’, 일본은 ‘작은 블랙홀’이라 할 만하다. 중국은 뭐든지 ‘중국에 있었다’고 하며 공자 맹자 고전을 들며 얘기한다. 일본은 한번 관계를 맺으면 빨려들거나 그렇지 않으면 배척당하기 십상이다. 21세기 국제정세에서 중국 일본 사이에 우리의 정체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공철학은 먼저 중국부터 보자.

 

중국은 ‘공천하국가사회(公天下國家社會)’ 개념이 있는데 철저히 공우선 사회이다.

중국에선 ‘천리인욕(天理人欲)’이란 말이 있는데 중국은 이를 ‘천리’와 ‘인욕’으로 나눈다. 천리는 공이고, 인욕은 사이다. 마오쩌뚱은 ‘파사입공(破私立公)’이란 말을 좋아했는데 ‘사를 없애 공을 세운다’는 말이다. 중국에서는 ‘공선사악(公善私惡)’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공은 선하고 사는 악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중국 시진핑 주석도 ‘공평무사(公平無私)’란 말을 좋아한다고 한다.

 

일본은 ‘공천하국가사회(公天下國家社會)’ 개념에 ‘천리인욕(天理人欲)’이란 말에서 ‘천’ 대신 천황(일왕) 또는 국가 정부가 들어선다. 그래서 ‘멸사봉공(滅私奉公)’이란 말이 강조됐다. 즉 나를 없애고 공을 받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패전 이후 20년 정도는 이에 대한 반발로 ‘멸공봉사(滅公奉私)’ 즉 공을 없애고 나를 받든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는데 다시 ‘멸사봉공’으로 돌아갔다.

우리나라는 조선 초기 정도전이 국가백년대계로 ‘공천하국가(사회)(公天下國家(社會)’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중국 일본과 달리 사회라는 개념이 거의 없다. 이러한 공천하국가 개념은 최제우의 동학사상이 확산되기까지 약 470~480년간 지속된 중앙지배 사상이었다. 동학사상은 이러한 공천하국가를 뒤짚는 사상이었고, 우리나라의 공공철학은 오히려 동학사상에서 출발한다고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공공’이 잘 나와 있다. 중국은 주자나 왕양명 때는 ‘공공’이 있었으나 책은 100권 정도에 불과하다. 일본은 서양어를 번역해 공공이란 말을 썼으나 일본 고유의 자료가 별로 없다.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실록에 공공이란 개념이 무려 600권 이상 나와 있다. 왕조시대에 목숨을 걸고 제기한 ‘공공’개념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2. 왜 공공철학이 의미가 있나?

 

서양의 경우 공공(public)의 어원은 그리스의 민주주의사회에서 찾을 수 있다.

(私)家(Oikos)-광장(Polis)=(公)광장. 집은 여자, 노예가 생명을 재생산하는 곳이라면 광장은 천가 국가 이야기를 하는 곳이다.

푸코는 죽기 전 미 캘리포니아 버클리캠퍼스에서 강연을 했는데 민주의 궁극적인 형태는 파레시아(Parrhesia)로 ‘속내를 다 말하다’는 것으로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절대권력자에 대놓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것이 민주의 핵심이라고 했다.

 

조선왕족실록 중 600권 이상에서 ‘공공’이 나온다. 그 핵심용어는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천하고금소공공(天下古今所公共)

둘째, 천하(만민)공분(天下(萬民)公憤)

셋째, 신인공분(神人公憤)

천하고금소공공은 중국과 달리 이 천하는 ‘온세계’를 말한다. 게다가 ‘고금’이 있어 옛날과 지금의 시대를 초월하는 공유개념이며, 특히 ‘소’라는 말은 ‘공공하는 바’라는 뜻으로 공공성이란 무엇인가 단지 아는 것을 넘어 공공화, 즉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 공공은 공공이성(公共理性)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공공화는 민주화 개념보다 높은 개념이라 볼 수 있다.

천하공분은 천하만민이 분노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공분감정을 나타낸다.

신인공분은 신과 인간이 더불어 분노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영성을 나타낸다.

 

중국은 주자의 글에 ‘천하공공지도(天下公共之道)’나 왕양명의 ‘天下公共之學)’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학문을 개인 것으로 해선 안된다는 말이다.

일본은 천지공공지실리(天地公共之實理)‘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천지‘는 중국의 황제 밑의 지배존재를 인정하는 천하 대신 천지라는 별도의 표현을 쓰고 있다.

 

여기서 텍스트(Text)와 콘텍스트(Context)의 개념을 부연설명하고자 한다.

텍스트는 선조가 남긴 고전으로 실증적 문헌을 말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들 수 있다. 콘텍스트는 텍스트가 성립되는 조건으로 한중미러 강대국에 둘러싸인 상황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그간 민주화=정권교체엔 성공했지만 아직 국가지도자부터 공공화 의식이 부족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사(私)를 중시해왔다. 나는 활사개공(活私開公)‘이란 말을 즐겨 쓴다. 다산 정약용 선생의 글에서 차용을 했지만 근원을 따지면 9000년전 환단고기의 치우장군의 ‘환단국’에 나오는 ‘이언구국(以言救國)’ 즉 말로써 나라를 구한다는 것이다. 즉 무력이 아니라 백성을 설득해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다. 얼마나 대단한가.

 

그리고 이러한 전통은 신라의 화백(和白)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백(白)이란 속에 있는 말을 다 드러낸다는 것이다. 화(和)란 각자 자기 말을 하는 것이다. 이는 바로 파레시아와 통하는 바이다. 우리나라가 중국 일본에 비해 파레시아를 잘 하고 있다고 본다. 민생이란 말을 자주 쓰는 것도 한 예이다. 일본은 주권, 체제, 권위, 임무, 책임을 중심으로 다룬다. 아베정권은 국민의 의무, 책임을 강조하며 국가 공권력이 방해받지 않고 행사하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최근 일본에선 아베정권에 수만명이 모이는 대대적인 데모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의 공공개념 및 시위문화가 스며든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외국에서 원숭이를 대상으로 실험을 했는데 두 마리의 경우 지배 복종관계가 나타나는데 세 마리의 경우 상호 균형이 가능하더라는 것이다. 공공은 둘 아닌 셋이 돼야 한다.

 

3.'위하여' 아닌 '더불어' 중시하고 실천하는 '진정한 자유를 찾는 나그네 정신'이 중요.

 

끝으로 우리의 철학유산을 다듬는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또한 청년세대에게 겸손함을 익히도록 해야 한다. 작아도 옹골지게 돼 있으면 존경을 받는다. 서울대에 한국철학을 깊이 연구하는 게 부족하다. 대부분 서양 중국철학이다. 중국의 경우 푸딘대는 철학과가 엄청 센데 중국의 가치 전통 문화를 소중히 하는 자가 성공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오래된 이야기지만 우리나라 대표적 철학자의 한분인 서울대 박종홍 교수가 파리에 갔다 하이데거의 초청을 받아 식사대접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서 한국철학 자료, 특히 천부경을 들고와서 설명을 좀 해달라고 했는데 천부경에 대해 알지 못했던 박 교수는 한국철학을 하이데거에게 소개할 천우의 기회를 놓쳤다고 나중에 어느 강연에서 소회를 밝힌바 있다는 것이다.

 

나는 공공성 개념을 이렇게 본다. 특히 시민의 경우 우리가 흔히 회식을 할 때 건배사로 ‘위하여’를 많이 하지 않나? 이는 ‘공의 논리’이다. 그런데 진정한 ‘공공의 논리’는 ‘위하여’가 아니라 ‘서로’ ‘함께’ ‘더불어’의 논리여야 한다. ‘위하여’는 강자의 논리이다. 진정으로 우릴 위한다면 ‘함께’ ‘더불어’ 상의하자. 나는 시민단체 시민운동이라면 국가나 정부 체제에 거리를 두고 함께 하는 시민이 진정 모여서 자유를 연모하는 사람을 만들어야 한다.

 

흔히 ‘디아스포라’ 이야기를 하지만 너무 국가에 매이지 않고 각각 자신을 찾으면서 지나치게 전체를 위한 이란 말에 매이지 말고 ‘꿈을 찾는 나그네’ ‘자유의 여신을 연모하는 나그네’가 되길 원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국가’나 ‘민족’보다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연모하는 나그네의 생각이 진정한 의미의 ‘공공성’을 찾는 길 아닐까 싶다.